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광주학생운동 세력은 각 부문의 운동권에 상당한 위신을 갖고 있었고 전국의 침체된 운동의 분위기에서 상대적으로 돌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80년의 봄을 맞았고 광주 학생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맡았던 전남대학교는 11
학생회는 그와 너무 달랐다. 대학의 학생회는 데모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대학의 학생회는 어떻게 시작되었고, 지금 현재 우리 전남대학교의 총학생회는 어떤 모습일까?
1. 학생회의 시작
지난 50년 민주화 운동의 중심엔 학생이 놓여 있었다. 학생 김주열의 눈에 박힌 최루탄은
학생 연대는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 모여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였다. 신군부는 이를 기회로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도 역시 비상계엄군이 각 대학을 장악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였다. 이에 울분한 전남대학교학생과 비상계엄군 간에 충돌
학생 및 깡패 등 현실불만 세력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사실무근한 유언비어를 날조해 퍼뜨린데 그 원인이 있다.”라고 보도하였다.
에 대항하여 광주에서 투사회보 윤상원이 중심이 되어 광주 지역의 사회운동 진영에서 정부의 거짓된 선무방송을 이겨내기 위해 발행되었다. 광주 서구 광천동에 위치
2) 전개과정
광주민주화운동의 전개과정은 다섯 국면으로 구분된다. 제1국면은 5월 18일 학생시위에 의한 항쟁의 발단기이다.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사전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집결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강력한 저지로 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