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으로 조선 정부가 친러파를 기용하여,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게 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시도. 하지만 본래의 의도와 다르게 항일의병활동의 원인과 아관파천의 계기가 되어, 일본의 식민지화계
, 청일전쟁부터 1904년 러일전쟁까지로 청국세력의 배제와 아울러 구미열강과의 이권쟁탈 및 러시아와의 경쟁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셋째, 러일전쟁에서 1910년 한일합병까지로 전쟁의 승리와 영국․미국 등 열강과의 외교관계속에서 소위 보호조약을 체결이고 이어 한일합병에 이르는 시기이다.
조선의 영토에 그리 큰 욕심을 내지 않았다. 이들 국가에게 조선은 교역만 할 수 있다면 굳이 점령할 필요가 없는 국가였다. 러시아는 조선보다는 만주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조선은 자신의 영향권 하에 두기를 바랬다. 일본만이 조선을 식민지화 해야 할 이유가 있었고 조선의 근대화를 돕는다
조약 체결을 그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당시의 서양 열강들의 팽창주의적 정책은 이러한 조약을 악용하여 세계 여러 지역을 식민지화 하여 자국의 경제적 종속국으로 전락시켰다. 이는 동북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따라서 19c말 조선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들의 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각
조선 왕조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식민지 확보를 목표로 하는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진행되는 시기로서, 일본이 1854년 미국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었으며, 중국은 1840년 아편 전쟁에서 영국에게 굴복한 후에 1856년 애로 호 사건의 결과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