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장락리(堤川長樂里) 7층전탑(七層塼塔) 등이 그 대표작이다. 그리고 중국의 영향으로 보이는 보협인탑(寶瑩印塔) 1기(基)가 전하고 있음은 주목된다.
이렇게 고려시대의 건축에 대한 설명과 감상을 함께 하면서 석탑에 비한 부도의 건립이 전대의 작례를 능가하는 많은 작품들을 남겼고, 형식의 다
제천현(堤川縣)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풀려났다. 1794년에 별검 춘추로 있을 때 정조에게 오주(誤奏)를 하여 삭직 당하였으며, 그해 홍문관교리가 되었으나 이응혁(李應爀)을 중비(中批)로 부총관에 임명함은 부당하다는 차자를 올렸다가 창녕현(昌寧縣)에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양남(兩南) 암행어사가
제천의 의림지보다도 훨씬 위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호남의 개념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설들을 종합해 볼 때, 앞의 것은 지리적인 것에 중점을 두고 그 한계를 짓고 있는가 하면 뒤의 것은 주로 문화적인 측면에다 초점을 맞추어 호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모두가 일리 있
제천(湖)을 거처 금강산(東)을 유람한 후 규당학사 김덕희와 결혼항, 주 부윤이 된 남편을 따라갔다가(西) 의주에서서울로 돌아와 용산삼호정(洛)에 거하게 된 때까지 그의 유람과 문견 등을 기록한 것이다. 이 글들은 철종 원년 경술년 늦봄에 탈고되었다.
이 글은 여정을 따라가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할 때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거점으로 하였다는 것.
㉡ 무신정권 초기에 나타난 농민천민의 난 때에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망소이의 난과 그 영향.
㉢ 몽고침입 당시 항쟁활동으로서 충주성에서의 관노비와 김윤후의 활약.
㈏인물
㉠견훤- 황간견씨(黃磵甄氏)의 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