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일제의 침략 이용물로 만들었으며 점차 한국 불교계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는 몇몇 선구자들이 등장하였다.
만해 한용운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고 그가 저술한 논문 <조선불교유신론> 또한 불교가 시대의 변화 속에서 그 본연의 지위를 회복하기를 촉구했던 개혁론의 하나
2. 조선불교유신론과 승려로써의 한용운
1901년 14세 때 결혼했던 고향의 처가에 돌아와 약 2년간 은신, 그 후 다시 집을 나와 방황하다 1905년 강원도 백담사에서 중이 되었다. 이해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방황하며 견문을 넓히고 귀국,안변 석왕사에서 참선하다가 다시 만주와 시베리아로 유랑, 1905년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敎學的關心)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36세 때에는 《불교대전 佛敎大典》과 함
불교의 획책을 폭로하여 그 흉계를 분쇄하는데 성곡했다. 한편 넓은 견문과 근대적인 지식을 터득한 그는 이같은 인식을 토대로 당시 조선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와 운든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 비판 한 대저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 ,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는 학구적인 입장에서 불
불교계의 개혁을 통해 그 폐단을 제거하여 예전의 번성했던 모습을 되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타락하고 변질된 불교의 종교적 순수성을 회복하여 대중 깊숙이 뿌리박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바로 <조선불교유신론>의 저술은 그런 그의 사상과 행동적 지침을 완성한 것이며, 친일매판불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