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게 되자, 결혼제도도 변화되었다. 조선 초기 이래 남귀여가혼, 즉 서류부가혼이 지배적이었으나, 이제부터는 여자가 남자에게로 시집을 오고 시부모를 모시는 결혼제도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단일 가족에 의해 농업이 경영되는 소농경영이 안정화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조세액에 대한 부당성을 향회(鄕會)와 정소(呈訴)를 통해 규탄했다. 향회나 정소운동은 봉건적 법체계에서 용인된 합법공간을 이용한 투쟁이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 그들의 요구가 실현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고을행정에 대한 공통적 이해를 나눌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농민항쟁
거의 잠잠해졌으며, 농민들도 스스로 해산했다. 임술민란은 농민들의 분노를 발산한 큰 사건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작은 규모의 민란이 다양한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따라서 조직력이 모자랐고, 시대적 한계에 의하여 농민들이 계급의식이 부족하여 그들의 요구를 보호받지 못했다.
토지세와 군포가 있었고, 본래 빈민 구제를 위해 시행되었던 환곡도 세금처럼 바뀌었다. 이를 세금으로 거두는 행정을 삼정이라고 하였는데, 관리의 부정으로 삼정이 크게 문란해졌다. 삼정의 문란으로 세금 부담이 늘어나자 농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 졌다.
조선시대 철종 13년, 삼정의 문란으로 백
조선후기의 국가재정은 만성적인 위기에 놓여 있었고 그것은 또 지방관청의 재정위기로 이어졌다. 그래서 농민에 대한 수탈은 점점 더 심해졌다. 500년에 걸친 조선시대의 한문학은 많은 작가들에 의한 새로운 작품이 다수 출현하여 많은 문학유산을 남기게 되었다. 우리가 논하는 조선 후기의 사회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