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음에 반영되지 않은 것은 형성 당시 우리말에 된소리 음운이 없었기 때문이며 이는 한국한자음의 형성 시기가 된소리 음운 구조가 생성되기 이전임을 반영하는 것이다.
참고로 현행 된소리 한자음은 「끽, 쌍」 두 음의 용례밖에 없다. 둘의 원음과 조선한자음은 「긱, 상」이었으며 된소리 발음
음이 창제된 것이다. 이러한 정책적 배경 외에도 세종대왕 당시의 학문적 배경도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아시아 제국에는 10세기부터 문자 창제의 물결이 꾸준히 흐르고 있었다. 거란 문자, 여진문자, 원나라의 파스파 문자, 월남의 쯔놈 등이 만들어졌다. 한자가 여전히 동아시아
해낼 수 있는 능력, 어떤 새로운 필요가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감당해낼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어야 한다.
국어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역대의 문헌 자료를 통해서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고대의 자료는 매우 적고, 또 한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기 어려운 형편에 있다.
음능력이 매우 풍부하여 쓰임에서 막힘이 없다는 점, 쉽게 배울 수 있게 되어있기 때문에 누구나가 이것으로써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우수성을 평가했다.
* 운서파
훈민정음에 대한 연구의 한 유파인 운서파는 한자운서의 편찬을 기본목적으로 삼고 한자음의 표기와 관련하여 제
음(한글) 부림의 우리 문자사용 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열려진 한글문화 부림의 세계는 허균(1569~1618)의 서민을 의식한 사회성을 근거로 하여 전개되는 사회참여성의 조선 후기 소설을 여는 서민소설의 생김새를 보여 주었다. 또, 서포 김만중(1637~1692)의 겨레사랑 한글문화 부림을 낳았다. 김만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