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 세력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함으로써 더 튼튼한 정치적 기반을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 신흥 사대부 세력이 중심이 되어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기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개혁정책을 실시할 수 있었다. 공민왕 시해 이후 권문세력이었던 이인임 일파 등이 우왕을 옹립함으로써 신흥사대부 세
왕비를 중심으로 한 세력으로 서울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이들은 가문간의 결속력은 강했지만 성리학에 대한 인식 수준이 사림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시가와 문장 능력을 중요시했다. 이런 체질 때문에 이들은 재야 지식인들이 입국명분을 들고 공격해 올 때 합리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성리학을 체계화했다.
왕조의 지속과는 상관없이 고려전기와 고려후기에는 이질성이, 고려후기와 조선전기에는 동실정이 두드러진다. 고려후기 신흥사대부가 주장했던 사상과 문학이 조선전기에 확고한 모습을 갖추고 널리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경기체가, 시조, 가사 등에서도 지속성이 인정된다.
성리학을 체계화 하였다.
고려전기와 고려후기 사이에는 이질성이, 고려후기와 조선전기 사이에는 동질성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는 고려후기 신흥사대부가 주장하던 사상과 문학이 조선전기에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신유학 사상이나 한문학, 경기체가, 가사, 시조 등에서도 지속성이
사대부들도 불교 때문에 당시의 사회가 곤란을 겪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신진 사대부들은 낡은 사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새로운 이념 체계를 요구하였고, 그들이 선택하였던 것은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태동된 성리학이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루어진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