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죠아적인 도시 의회들이 교회의 행정 조직에 대항하여 점차 더욱 많은 권한을 요구함으로서 중세의 봉건적 종교 권위에 대한 도시들의 반항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특이한 도시 공화정치를 배경으로 하여 독일계 스위스종교개혁은 울리히 쯔빙글리의 지도 아래 발전하기 시작했다.
종교 권위에 대한 도시들의 반항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특이한 도시 공화정치를 배경으로 하여 독일계 스위스종교개혁은 울리히 쯔빙글리의 지도 아래 발전하기 시작했다.
2. 개혁가 쯔빙글리의 생애
쯔빙글리는 루터보다 2달 늦은 1484년 1월 1일 쮜리히에서 64 km 정도 떨어진 토겐부르크(
종교개혁의 배경이 되는 후기 중세는 기존의 권위와 이에 대한 반항의식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 시기의 교회는 세속권세를 아울러 지배하려는 교황청의 집요한 시도를 통하여 교황권의 우위가 계속적으로 선포되던 시기였으며, 이에 대하여 산발적인 비판이 있었다. 또한 세속군주들은 이와 반대로 교
종교개혁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하였기 때문이다.
본래 재세례파는 루터나 츠빙글리의 동지나 제자들이었으나 그들이 처음에 생각하고 있던 개혁의 이념에서 이탈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 몇 년 동안에 이 운동은 스위스와 독일에서 수많은 추종
확립에 노력하였다. 특히 마르부르크회담에서는 성찬에 대해 일치를 얻지 못하고, 스위스종교개혁자 U. 츠빙글리와도 결별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동맹의 꿈이 깨졌다. 루터는 최후까지 설교·강의·권고·저술에 종사하고 귀족들의 분쟁화해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으며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