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기제사 준비(忌祭祀 準備)
기제사 전날 아침 일찍부터 집의 안팎을 깨끗이 쓸며 닦고, 안에서는 제찬(祭饌)을 작만하고 밖에서는 제구(祭具)를 갖추고 당안을 청결히 청소하고 제주이하 여러 자손들이 각기 목욕하고 제복을 입고 축문과 지방을 써놓고 당에 들어가 자리를 펴고 젯상을 놓고 기제사
좨주(祭酒)가 되었다. 제나라 사람 중애서 어떤 이가 순경을 참소하자, 그는 초나라로 떠났다. 초나라의 춘신군은 그를 난릉(蘭陵)의 현령으로 임명하였다. 춘신군이 죽자 순경도 관직에서 쫓겨났지만, 이 일로 집안 대대로 난릉에서 살았다.
이사(李斯)는 일찍이 순경의 제자였는데 훗날 진나라 재상
좨주곽가 역찬성조의 설시소성다의 래필지완 불여선격유비 교위득계
得?[d?j?](계략·계획 등이) 실현되다
다시 좨주이던 곽가도 또한 조조의 의도에 찬성하길 원소 성격이 의심이 많아 반드시 옴이 늦을 것이니 차라리 먼저 유비를 공격함이 비교적 좋은 계책이라고 했다.
操遂督兵出都, 直達徐州, 劉
있는 학자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직하의 최고 사상가가 맡는 좨주 벼슬을 세 번이나 지낼 수 있었다. 좨주는 대부 정도에 해당하는 명예직에 지나지 않았지만,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때면 술을 부어 제사하는 일을 담당하는 벼슬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가장 덕망 있는 사람에게 맡겨지는 자리였다.
직제는 고려의 제도를 대부분 답습한 것으로 대사성 1명, 좨주 1명, 악정 2명, 직강 1명, 전부 1명, 박사 1명 순유박사 7명, 진덕박사 2명, 학정 2명, 학록 2명, 직학 2명, 학유 4명, 서리 2명, 모두 22명의 교수직을 책정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성균관 유생의 입학자격은 생원·진사 200명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