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과 국가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다. 황제는 정신생활의 지도자로서 유, 불, 도 세 사상 중 하나를 권장하여 흥기시킬 수도, 억눌러 쇠망시킬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사상적으로 자유를 갖지 못했고,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학자들을 박해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학문이 학
라. 리일분수(理一分殊)
배[船] 하나하나의 리와 배[船] 일반의 리가 있고, 사람의 경우는 개인적인 리로서 본성이 있고, 사람이라는 보편적인 본성이 있다. 이 관계를 주자는 ‘리일분수’라고 하여 보편리의 개별 사물에의 ‘온전한 분유(分有)’를 말하고 있다. 즉, 개별리는 보편리와 같은 것이 된
주자의 생애
주희(1130~1200)는 남검 우계에서 주송(朱松)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원회(元晦)이고, 호는 회암(晦庵)이다. 흔히 주자(朱子)로 존칭된다. 그의 아버지 주송은 당시의 송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바로 이 점이 아들인 주희의 학문방향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학문은 이 4명을 중심으로 북송의 신학풍을 받아 집대성한 것인데, 정주학이라는 명칭이 말하듯이 이정, 특히 정이의 학설을 계승, 전개하고 있으며, 그런 뜻에서 이 책은 주자학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또 그해 여조겸의 제창으로 당시 사상계 한편의 우두머리였던 육구연 형제와 <아호의 회>라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자는 이 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