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배경
- 명을 치려는 후금으로써 배후의 조선에 대한 불안을 없앨 필요가 있었음
인조반정 후 논공행상에서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고, 실패 후 후금으로 도주해서 광해군이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 그것을 명목으로 조선을 공격
과정
- 후금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조
주화론으로 발전되어 그 대립은 더욱 심해지게 된다. 그 후 효종 집권시기에는 북벌론이 크게 대두되었고, 그와 대비되는 북학론도 나타나 미약하게나마 조선 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1-2-1. 명분론
① 화이론
- 중화와 이적(오랑캐)의 구분을 내용으로 하는 화이분별의 관념에서 이적과
③ 광해군의 중립외교
명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후금은 명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고 명나라는 큰 병력을 풀어서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 지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 왔다.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1619년 1만 3천 명나라의 원병을 보냈으나, 도원수 강홍립은 후금의 감정
Ⅰ. 서론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는 김상헌의 척화론과 최명길의 주화론이 대립하고 있었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중요시하고 오랑캐를 섬길 수 없다는 척화론은 명분을 중시하는 입장이었고, 청나라와 화친하여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주화론은 현실에 입각한 입장이었다. 45일간의
Ⅱ. 본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