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해방군 출병을 요청한다. 이에 스탈린은 슈찌꼬프에게 조선을 도와주라는 전보를 보내고 중국에도 의용군 요청 전보를 보낸다. 결국 10월 2일에 중국은 참전을 결정하고 5일에는 즉시출병 결의를 채택한다. 8일에는 펑떠화이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 설립에 관한 명령이 내려진다.
2. 중미전쟁의 체제와 전개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참가하자 내전은 중미전쟁이 되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펑떠화이의 건의에 따라 인민지원군 사령부를 만들었는데 펑떠화이를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하고 부사령원 겸 정치위원에 떵화와 함께 박일우를 임명하였다. 즉 박일우는 서열 3위로
중국측에 참전을 요청했고,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 역시 소련과 중국측에 참전을 요청했다. 결국 중국공산당은 50년 10월 2일 한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한 날, 참전을 결정하였다. 10월 8일 펑떠화이를 총사령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 설립에 관한 명령이 내려졌다. 그런 후에 저우언라이가 소련에 파견되
중국이 북한을 도울 수 있도록 원조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중공단과 정부 안에는 출병신중론이 강하였으나 마오쩌뚱이 필사적으로 설득하여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10월 2일 참전을 결정하였고 10월 8일 펑떠화이를 총사령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 설립에 관한 명령이 내려졌다.
중국정치
중국에서 참전하도록 압력을 가해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또한 뻬이징에 박헌영이 직접 가서 중국인민해방군 출병 요청문을 제시하였다. 여기에서도 역시 “적군이 38도선 이북 지역을 공격중인 지금 긴급히 중국인민지원군이 우리 군을 원조하기 위해 직접 출동해주실 것을 바랍니다”라고 적혀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