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자리는 원래 왕궁이 아니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이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왔으나, 전쟁으로 인해 모든 궁궐은 불에 타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옛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이 곳을 임시 궁으로 삼고 이름도 ‘시어소’라고 하였
주변은 1880년대에 이미 서양 여러 나라의 공사관 부지로 떼어주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잘려 나간 모양이었다. 또한 1904년 역시 일제의 방화로 추정되는 큰불로 인해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등 주요 건물 들이 소실되었다. 혼란한 정국 속에서 소실된 건물들의 복구는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덕수궁 한가운데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중화전이 자리 잡아 왕의 위엄과 그 옆에 이국적인 석조전의 서양 양식의 건물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덕수궁 안의 서양 건축과 한국 전통 건축이 마치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이 공존하는 대조적인 배치가 조화롭게 느껴질 수 있었다. 따라서 음양오
중화전으로 가기 전에 통과해야 하는 다리이다. 다리 아래에는 어구가 있는데 옛날엔 물이 어디로부터 흘러왔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물이 고여 있어 마치 웅덩이같이 보였다.
어구는 그 형식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돌다리 역시 두틀의 홍예로 교각을 이루었다. 다른 돌다리들은 짐승을 조
월산대군이 사망한 후 104년이 지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의주(義州)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93년 10월 한성으로 돌아와 보니 한성 내에는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이곳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집은 경내가 협소하므로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