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의천이, 의종 19년 및 명종 22년에는 지칭(智偁)이, 명종 10년에는 정각승통(正覺僧統)이 고시관을 했다는 기록을 통해 고시관은 각 종파의 고승이 겸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으나 무신집권 이후에는 간혹 유학을 닦은 과거급제자도 고시관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무신정변 이후 큰 화
1919년 2월 14일 이승훈(본명 이인환, 호는 남강) 장로는 평양 기흘병원에 목사들을 모으고 3·1 운동 거사에 대하여 비밀회의를 열었다. 그 때에 몇몇 목사들은 이 장로의 설명을 듣자마자 자기들은 종교인이므로 그러한 정치운동은 할 수 없으니 빠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남강은 책상을 치며 "나라 없는
지광국사해린 解麟(984~1067)이 만년에 주지로 부임하고 후에 열반함으로써 더욱 큰 가람으로 번영하게 된다. 그것은 고려 선종 2년 1085년에 이 절에 지광국사의 부도와 탑비, 이를 안치하기 위한 부도전이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법천사는 매우 중요시 되었는데 지광국사탑비 뒷면에 왕이 현화사에
1. 서론
초기 고려초기의 불교에 대한 연구는 김영수 선생의 五敎九山說 이후 60-70년대 시대구분논의가 진전됨에 따라 나말여초를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전환기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 역사학계의 연구는 신라 하대 수입되어 재지세력들에게 호응을 얻기 시작하며 사회적
이번 과제를 위하여 교수님께서 추천하여 주신 여러 답사 장소들 중 내가 선택한 곳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2리에 소재한 법천사지 이었다. 법천사지를 선택한 이유는 우선 원주에 소재하고 있는 관계로 답사하는데 그다지 많은 시간이 소요 되지 않으리란 것과 무엇보다 20여년을 원주에서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