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로 얻어낸 대승 “지평리전투”
Ⅰ. 지평리전투의 개요
지평리전투는 6·25 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이 1951년 2월 세번째의 큰 공세를 개시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전선을 밀어 내려오고 있을 때,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국 2 보병사
지평리전투는 1951년 2월 13일~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미국2보병사단 23연대전투단 & 23RCT에 배속된 프랑스대대
VS
중국 인민해방군 39군
3일간 벌인 격전
1950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1 ·4 후퇴와 장진호 전투 등 후퇴를 겪어야 했던 유엔군은 1951년 2
1951년 2월부터 반격
- 울프하운드 작전, 썬더볼트 작전 / 한강회복 라운드업 작전…
2월 11일 ‘2월 공세’
- 삼마치 고개 및 지평리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
2월 13일 “지평리를 고수하라”
- 삼마치 고개의 한국군, 미국군의 후퇴 / 지평리의 미 23연대와 프랑스 대대
“ 지평리를 포기하면 인접한 9
사수의 이유
1. 교통의 요지
도로와 철도가 가로지르는 지역으로 물자 전송 및 병력 이동의 이점
2. 전략적 요충지
높이 100~400m에 이르는 8개 정도의 고지의 둘러 싸여 있어 지리가 5~6km쯤 되는 사주방어 진지형성 가능
3. 후퇴의 불가피성
23연대가 지평리에서 철수하여 중공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