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계유(陳繼儒, 1558-1639)를 지형산으로 초청하였는데 왕형(王衡)은 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였다. 왕시민 역시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서화를 배워 탄탄한 기초를 닦았다. 만력 42년(1614) 왕시민은 수도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는데 상보승 벼슬을 시작으로 관직이 태상사소경(太常
진계유, 막식룡 등의 사대부 화가들은 원대와 명대에 꾸준한 진보를 보인 문인화 이론에 한층 더 당위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 송강파 화가의 중심인물은 동기창(명대의 가장 전형적인 사대부 화가로서 예부상서를 포함한 많은 관직을 역임했으며 원대의 조맹부, 그리고 16세기의 문징명, 축
진계유는 《태평청화》에서 ‘조선인들은 책을 제일 좋아한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이 16세기에서 17세기 초반의 경험인 점으로 보아 당대인들의 서적에 대한 관심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서적은 단순한 독서물에서 가문의 자랑거리로 여겨졌으며, 또 마니아층을 형성하면서 완상물이
진계유, 탕현조 등의 작가들의 소품을 주로 읽으며 기존 산문에 반하는 스타일로서 소품문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백탑파의 글에는 새와 곤충과 풀을 다룬 이서구의 글과 화초 키우는 법을 다룬 박제가의 글 등이 있으며 이들은 자유롭고 실험적인 글쓰기 방식으로 일상의 소재를 다루었다. 그러나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