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어느 시대든 정치적·사회적으로 새로이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이라면 나름대로의 고뇌와 책임을 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나말여초’의 역사적 전환기 속에서 육두품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펼 기회조차 없었던 최
○ 문화재에 대한 설명
-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 1347호)
대흥사서산대사부도는 대흥사 입구에 자리한 부도전 내에 건립되어 있다.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구비한 석조부도로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고 부도의 전체 높이는 2.7m이다.
인근에는 서산대사부도의 탑비가 있는데, 귀부·비신·
탑비에 의하면 원효의 별칭으로 고선대사, 만선화상이 있었으며, 구룡, 백부론주 등의 칭호도 있고, 입적한 뒤에는 고려시대 숙종에 의하여 화정국사라는 시호가 주어졌고, 고려시대의 대각국가 의천은 원효보살 또는 원효성자라는 존칭을 썼다.
원효불기조에 의하면, 원효는 태어나면서 총명하고
탑비 부근의 땅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비신(碑身)이 없어서 그의 행적을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조당집'이나 사자산문을 개창한 징효대사(절중(折中),825 ~900) 보인탑비 등에 부분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선사는 신라 원성왕 14년에 태어나 18세에 출가하여 김제 비귀
대사를 만나 계를 받았다.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지리산 화개에 이르러 dlfWLr이 삼법이 일구었던 옥천사를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 문성왕 12년(850) 77세를 일기로 입적하기 까지 쌍계사에 머물렀다.
진감선사 탑비는 신라 정강왕이 신라 말기의 고승 진감선사 혜소(774년-850년)의 높은 도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