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봉호가 6세기 중반 이래 새롭게 변모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삼국과 수·당이 수수했던 책봉호를 분석하여 수·당의 동방정책과 삼국의 대응책을 고찰하려고 한다.
1. 남북조 말기 책봉호(冊封號) 구성의 변화
4세기 이후 동아시아에는 중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질서가 붕괴되고
니시지마 사다오에 대한 비판
일원적인 국제질서란 과연 존재했었는가?
조공책봉관계는 정치적 상하질서의 확인작업
중국중심으로 편찬된 사료의 한계
동아시아 역사에서의 한국의 배제
당에 대한 신라의 태도
당이 요구하는 일원적 체제에 우호적.
고구려가 반발한 것과는 다른 태도.
한반도
그 과정 속 여러 사건들을 ‘책봉이 실효성이 있었다’라는 일본 학계의 관점에서 해석했다는 의의가 있다. 이는 ‘책봉이 실효성이 없었고 단지 허례허식에 불가했다’라는 한국 학계의 입장과 상당히 괴리되는 부분으로, 고대 국가들 간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임진왜란과 광해군의 세자책봉
광해군은 출생 순으로 보면 선조의 둘째 아들이다. 게다가 후궁에게서 출생한 서자였다.
서자 그것도 둘째아들에 지나지 않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 된 것은 임란이라는 비상사태 때문이었다.
임란이 발생하기 직전까지 선조는 왕위에 오른 지 20여년이 되었는데
1. 조선시대의 세자
차기 왕위 계승권자. 왕세자․세자․세자궁․동궁(東宮)․춘궁(春宮)․정윤(正胤)이라고도 하며, 저하(邸下)라는 존칭어로 불렀다. 기원은 왕위계승이 부자세습제도로 확립되면서 시작되었다. 태자는 부왕의 재위 기간 중 책봉의식을 거쳐 결정되는데, 자격조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