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파(斥和派)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삼학사(三學士)들이 자신들의 주장에 책임을 지기 위해 스스로 청진영으로 나아가고, 심양으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17세기 초는 조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조선, 명, 일의 3국의 정세에 중대한 시기이며 이러
척화파의 척화파와 주화파는 병자호란 후 등장한 세력으로, 척화파는 김상헌,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명분을 존중하는 성리학자로서, 청의 압력에 즉시 무력으로 응징하자고 주장하였고, 청과는 사대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을 주장한 대의명분을 강조한 성리학자이고, 주화파는 최명길 등 양명학자로서
척화파(斥和派) 신료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丁卯年,1627년)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이어 ‘황제 운운’하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의 목을 치라고 목소리
발발해 남한산성으로 무력하게 도망가는 인조와 조정 대신들의 모습을 시작으로 적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의 모습을 매우 절망적으로 그렸고, 그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인조와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으로 진전되지 않고 나빠져만 가는 성안의 상황과 대립 구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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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파로 몰려 중국으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던 이야기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다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세월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라는 시조를 읊으며 청나라로 끌려가던 김상헌의 의지는 강했다.
또한 그런 선비는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청백하였다.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