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정(牒呈)에 의하여 계하기를,“선농단(先農壇)과 우사(雩祀)와 산천(山川)에 기우제 지내던 제단(祭壇)은 방(方)으로 1백 보(步) 되게 하고, 그 안에서 단(壇)에 가는 거리가 10보쯤 되는 주위에다 소나무를 심으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35권 9년 2월 2일 (경신) 007 / 소나무를 성균관의 주산에 심
첩정 유시공고득총
양제는 왕세충이 장수의 재략이 있다고 여겨 자주 도적을 잡음을 맡기니 가는 곧마다 곧 평정하니 이로부터 왕세충의 공로가 높아 총애를 얻었다.
是日世充出班奏曰:“臣擧一將爲先鋒, 可破李密。”
시일세충출반주왈 신거일장위선봉 가파이밀
이 날에 왕세충이 반열을 나와
첩정을 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포위하였는데, 이억근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새벽을 이용하여 적소(賊所)에 들어갔다가 일곱 대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이라고 쓰여져 있다.
정도로 위세를 떨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항상 의로운 행동만을 하는 것이 아닌,
새만금
장기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엄청난 사업비 부담 때문에 구상단계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않던 새만금 사업은 13대 대선을 한해 앞둔 86년부터 본격 추진되기 시작했다.
86년 6월 전북지역 주민들의 정서를 달랠 수 있는 선거용 정책을 찾는 데 골몰해 있던 전두환 정부와 여당(민정당)은 전북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