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박종화, 홍사용, 이상화로 대표되는 <백조> 동인의 경우 3·1 운동의 좌절로 인한 암담한 절망감과 결부되어 퇴폐적이고 애상적인 분위기는 더욱 증폭되게 되었다.
- 최승구
1892년 경기 시흥에서 출생했다.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일본 게이오 대학[慶應大學] 예
2. 신체시의 과도기적 성격
1) 최남선과 신체시의 의의와 한계
신체시가 첫 선을 보인 것은 『소년』지 창간호(1908.11)를 통해서였다. 최남선은 자신이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인 『소년』지 첫머리에 『海에게서 少年에게』를 발표한다.
이 시에서 작자는 ‘계몽적 화자’를 내세워서
최승구와 연애에
빠짐. 최승구는 [학지광]의 인쇄인.
19세 : 1915년 그녀의 주도로 재동경 여학생의 모임인 '조선여자유학친목회’
조직. 그 모임의 고문은 전영택과 이광수!
이미 결혼을 해 부인이 있는 최승구와 약혼.
40대 그리고 죽음
40세 : 1935년, 조선관에서 대규모 전시
최승구와 사랑에 빠지는데,
최승구가 일찍 죽고 그를 그리워하는 글을 쓴다.
원망스러운 봄밤 중 일부.
저것이 무슨 소리일까 쫄쫄쫄쫄
아침부커 저녁까지
밤부터 새벽까지
춥든지 더웁든지
싫든지 좋든지
언제든지 쉬지 않고
외롭게 혼자 흐르는 냇물이로다.
냇물 냇물
저렇게 흘러서
호되고 강되고
최승구와 연애
12월 유학생 잡지에 글쓰기 시작 - 이상적 부인 발표
-> 당시의 여성으로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 것은 여성도 교육을 받아 나라의 일꾼으로 쓰여야 한다는 오빠 나경석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당시 사회 의식과 독립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나경석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동생이 신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