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중성을 대파한 후, 비로소 신라가 당에 항복하였다. 이는 신라의 교육제도가 화랑에서 중국식 교육제도로 바뀌는 것을 공식적으로 당에 알리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신라는 당과 대등한 국가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독자적인 신라의 연호를 사용하였지만 진덕왕 4년(650)부터는 당의
칠중성(七重城)을 침입한 고구려군은 알천의 군이 격퇴하였다. 또 태종무열왕 2년(655)에 고구려백제말갈이 연병(連兵)하여 북거의 33성을 습취해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갈은 고구려에 복속된 부류이며 여제(麗濟)의 연병이라는 기록이 문제된다. 흔히 이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했다고 서술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해 오자 11월에 이를 격퇴
642년 - 백제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김. 백제가 당항성(唐項城)을 빼앗겨 나당(羅唐)의 통로가 끊어졌고, 백제에게 대야성(大耶城)까지 함락당하자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3년 - 고구려·백제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해 오자 11월에 이를 격퇴
642년 - 백제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김. 백제가 당항성(唐項城)을 빼앗겨 나당(羅唐)의 통로가 끊어졌고, 백제에게 대야성(大耶城)까지 함락당하자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3년 - 고구려·백제
칠중성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말을 달려 훈련했으므로 설마리(薛馬騙)라고 하였다 한다. 또는 설인귀가 추운 겨울에 눈이 쌓인 상봉을 거쳐 감악산봉으로 말을 달려 무예를 쌓았다고 하여 설마리(雪馬里)라 하였다고도 한다. 설마동, 설마치라고도 한다. 사기막은 설마치고개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