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메니우스는 신비주의 사상과 교회 일치 운동에 큰 통찰력을 가지게 되었다.
1616년 코메니우스는 스물네 살의 나이로 형제단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2년 후에 흘네크(Fulnek)의 아름다운 한 교회의 목회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목회 활동과 함께 교회에 부속된 학교에서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교육’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모든 방법으로 가르침으로써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자연 세계의 질서 속에 선하고 참되며 의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인간구원을 교육목적으로 설정했다. 이 장에서는 교육철학및교육사2A) 코메니우스의 합자연의 교육원리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
인간의 상응점을 찾으려 했다. 또한 이 시기의 인간의 역사란 개방된 것이 아니라 신의 구원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1492년 아메리카의 발견을 계기로 정복을 통한 물질이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세계의 정치, 경제는 변화하고 있었고 서구 세계의 삶의 공간은 더 확장 되었다. 이렇게 뒤엉킨
갖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나이도 많고 또한 지도하는 교사 역시 잘 지도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다른 길을 찾아서 18세에 헤르본 대학에 가게 되었고 그 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가게 되었다. 코메니우스는 17세기에 이미 세계평화를 위한 새로운 교육사상을 정립해 인간교육의 새 지평을 열었다
삶의 영역을 ① 교육학의 연구 ② 세계평화의 건설 ③ 범지학의 연구와 저술 ④ 예언의 실행을 위한 노력으로 설명하고 있다.
코메니우스는 말년에 Amsterdam에 정착하여 평화스럽고 명예스럽게 보내면서 1670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그는 후세에 ‘세계의 교사(Teacher of nations)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