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귀족출신의 이찬 칠숙,아찬 석품의 모반과 실패
53년(631) 여름 5월에 이찬 칠숙이 아찬 석품과 반란을 꾀하였다. 왕이 이를 알아
차리고 칠숙을 잡아 그를 동쪽 시장에서 목베고 구족(九族)까지 멸했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의 국경에까지 이르렀다가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보고자 하여, 낮에
왕(陽原王)을 양원상호왕(陽原上好王), 25대 평원왕(平原王)을 평강상호왕(平岡上好王)이라고 한 것이나,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예(『삼국사기』)에 비추어 보면 왕을 아름답게 부르는 미칭(美稱) 혹은 존칭(尊稱)이라고 볼 수 있다.
끝으로, ‘국강상’은 그의 능묘가 위치한 곳의 지명이다. ‘고국
왕을 한 번 만나 백옥 한 쌍과 황금 2000냥을 받았고, 두 번 만나 상경에 임명되었으며 세 번 만나 재상이 되었다. 우경은 사태를 헤아리고 상황을 추측하여 주도면밀한 계책으로 효성왕을 도와 어려운 나라의 정세를 바꾸어 오히려 진나라가 조나라에 화친 사신을 보내게 만들고 조나라와 위나라가 합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