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시체제가 프랑스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단절에 해당했다는 주장이 우세했다. 다시 말해 비시는 독일점령으로 인해 탄생된 우연적인 정치사건으로서, 오늘날의 프랑스 정치와는 무관한 대독협력자들의 괴뢰정부로 인식되었으며, 페탱이 내세운 민족혁명은 독일에 의해 강요된 정치이데올로기로
1. 비시정부의 합법성에 대한 논란
1) 비시정부의 수립과정
1940년 5월 10일 전쟁이 발발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6월 14일 독일의 군대가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할 때까지 프랑스정부는 전쟁다운 전쟁 한번 해보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졌다. 독일군의 공격에 보르도까지 쫓겨 온 프랑스 내각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전면에 등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는 보수적 공론영역-보수적 정치사회-보수적 국가라는 연속선상에서 보수적 엘리트카르텔의 집단적 이해가 관철되는 사회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한국의 정치사회와 시민사회는 단절되었다기 보다는 특정한 시민사회의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 측에서 새로운 기득권의 출현을 반가워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을 중심으로 국제적으로 이러한 이탈리아의 제국주의적인 움직임에 대한 견제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대 이탈리아 수입, 수출에 대한 금지와 같은 경제적 제제 조치를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