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파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양명학은 초창기의 호감과는 달리, 이황과 그의 제자들에 의한 학문적 비판 비판의 내용은 대부분 양명학이 불교의 선종에 가깝기 때문에 유학의 정통을 이은 것이 아니며, 특히 인간의 도덕성을 부정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초기의 비판은 순수한 학문적 의도
율곡 사계의 학통을 이어받아 율곡의 성리학을 주자학의 정통을 이은 것으로 만든 사람은 우암 송시열이다. 우암은 퇴계와 우복의 학설을 공격하고 율곡의 설이 옳음을 논증하는데 평생을 바쳐 노력했는데 이는 당시에 예송문제로 격화된 당쟁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우암이 48세때 유직柳稷등이 율
학파가 아님을 역변하였고, 그의 가학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는 사람으로서 양명 좌파의 사상을 수용한 사람이 있다. 바로 허균이다. 그는 왕수인과 양명 좌파의 하심은, 이지 및 공안파의 신문예 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이들과 통하는 점이 매우 많았다. 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하곡 정제두의 양명학
1) 양명학 재해석 동기
하곡 정제두는 조선 유일의 양명학자로 지칭되어지는 만큼 한국 양명학에 있어서 그가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그가 당시 이단으로 배척되던 양명학을 공부하게 된 배경은 초기 양명학 수용자였던 최명길 등 서인계 가문과의 관련성과 함께 당시 반주
정제두
인물 소개
1649년(인조 27)∼1736년(영조 12). 조선 후기의 유학자·양명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몽주(夢周)의 후손으로, 우의정 유성(維城)의 손자이고, 진사 상징(尙徵)의 아들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는 이상익(李商翼)에게 수학하였다. 몇 차례 과거시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