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변화가 점차적으로 희미해져 가는 현실에 부딪히고 있다. 이제는 경건을 위시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기만족에 중심한 신앙생활로 나타나고 있다. 교회를 하나의 기업으로 보고 소비자 중심적인 교회로서 신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으로서 경건의 이름을 붙여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칼빈이 그 서문을 써냈는데 이것이 칼빈의 첫 출판물이었다. 이 대학에서 칼빈은 법학 외에 이 학교로 초빙되어 온 볼라르로부터 계속 헬라어를 배웠다. 1532년 그는 오를레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러한 법학 지식은 나중에 자신의 제네바에서의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다.
1531년 5월말에 교
학위취득과 함께 대학에서 성경학을 강의하는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죄의 문제였다. 그의 지나친 참회의 고행을 통해서도 극복될 수 없었다. 더욱이 오캄주의자들의 은혜의 교리도 만족스런 해답을 주지 못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토마스주의자인 동시에 신비주의자였던
경건주의이다. 합리주의는 정통주의의 지적 기반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며 17-18세기 영국과 프랑스에서 위력을 떨쳤다. 그러나 합리주의는 18세기가 되기까지 독일에서는 큰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고, 대신 정통주의에 대한 또 다른 강력한 반대 세력으로서의 경건주의가 17세기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것이 아니라 교회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최대의 강조점은 신자의 공동체로서의 무형교회가 아니고 신자의 어머니(mater fidelium)로서의 유형교회에 있다. 종교 개혁은 이 같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회론과 결별하면서 다시 한 번 영적 유기체로서의 교회에 주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