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군 “위안부”의 지역적 분포와 특징 ] 본문 일부분 발췌
일본군은 전국적으로 위안소를 설치하였다. 피해자들의 연령대는 11 .12살에서 ~ 43살 정도로
대부분이 16~17세이었으며, 수적으로 한국인이 가장 많았는데
우리나라에서만 20여 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중략)
[ 한일협정의 한
위안부’동원의 경우 대체로 민간인만이 전면에 드러난 경우가 대부분이나 군인· 경찰· 관리가 취업사기를 직접 주도했다고 증언한 사람도 상당수에 이른다. 그러나 이렇게 관 알선 방식의 노동력 동원과 여러 가지 유사한 점을 보이며, 전도금 지급을 위한 거액 조달이 민간인으로서는 힘들었을 것
등 일본 재벌들 외에 경성 방직, 대흥 무역, 조선 비행기 공업 등의 일부 한국인 기업도 군수 공업의 혜택을 받았다.
2. 중화학에 집중된 공업 구조
• 1938년 공업생산액 > 농업생산액
1938년 공업생산액이 농업생산액보다 많아졌는데, 특히, 금속 공업, 화학 공업, 전력 등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1. 문제의 부상
1991년 12월. 세 사람의 한국인 종군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면서 처음으로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소송을 제기하여 일본인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기억에 새롭다. 세 명중 유일하게 본명을 사용했던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에 오기직전 일본 NHK인터뷰에서
위안부문제가 본격적으로 사회 여론화된 것은 1990년 5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에 앞서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서울지역여대생대표자협의회 등이 일본에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사실은폐, 중단과 진상규명, 공식사과를 촉구하면서부터이다.
1991년 12월, 세 사람의 한국인 종군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