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학문적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지식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해방 후 이념의 대립과 남북한 분단정부의 수립 및 6․25전쟁은 지식인들에게 흑백논리에 입각한 선택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많은 지식인들을 남한 사회에서부터 도피시켰으며, 이로써 남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남
모든 역사 연구는 사회적 실천이며, 연구자 자신의 의식 여부와는 상관없이 어떠한 형태로든 사회성을 띠지 않을 수 없다. 80년대 이전까지의 역사 연구가 고증에 치중하는 연구에 국한되었던 것은 역사 연구의 이러한 특징(당시의 정치 이데올로기와 대립하지 않는 역사 연구만이 발전하였던 상황)을
양자에 공통된 것이었으며, 그들의 민족주의사관은 관념적 성격이 강하였다.
신채호와 박은식의 역사학과 역사관을 토대로 그들의 민족주의사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한국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을 성립시킨 사학자로 평가받는 그들의 사학사적 위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 그와 동시에 그동안 남․북의 이데올로기 차이로 인해 우리에게 쉽게 다가올 수 없었던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백남운의 역사관은 어떠하였는가? 그리고 그가 제창한 역사란 어떤 것인가? 본고에서는 이러한 그의 삶과 역사인식, 그리고 사학사적 의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사학의 대표로 일컬어지는 정인보를 비롯하여 문일평, 손진태를 중심으로 그들의 역사인식에 대하여 조사하였고, 그것을 통해 작게는 후기 문화사학, 크게는 후기 민족주의 사학이란 무엇인지, 과연 그것은 사학사적 입장에서 어떤 의의를 갖고 어떤 한계점이 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