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韓愈
1) 生涯
한유(韓愈, 768-824)의 자는 퇴지(退之)요, 시호(諡號)는 문공(文公)이다. 본적지는 하북성(河北省) 창려(昌黎)인데 송대(宋代)에 창려백(昌黎伯)이라는 작위를 추증(追贈)받았으므로 한창려(韓昌黎)라고도 부르며, 출생지는 懷州 修武縣, 지금의 하남성 남양(南陽)이다.
3세 때 고아가 되어
1. 한유(韓愈)의 생애
올곧은 의지와 고고한 기상의 소유자, 韓愈
한유(768~824)는 현령의 벼슬을 지낸 한중경(韓仲卿)의 4남 중 막내아들로 등주(鄧州) 남양(南陽: 지금의 하남성) 사람이다. 자는 퇴지(退之)이며,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후에 조상이 창려현(昌黎縣)에 이주해 와서 살았기 때문에 사람
【작가 : 한유】
한유(韓愈 : 768~824)의 자(字)는 퇴지(退之)이고, 등주(鄧州) 남양(南陽 : 지금의 하남성) 출신이다. 선조가 하북(河北)땅 창려(昌黎)현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한창려(韓昌黎)’라 불렀다. 또 사후의 시호는 ‘문(文)’이어서 ‘한문공(韓文公)’이라고도 칭했다. 한유는
1. 서론
모든 철학적, 혹은 사상적 문제는 그 시대 상황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철학자나 사상가는 그 시대의 고민을 해결하려는 데서 문제 의식을 갖게 되고 또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한다. 중국 唐代의 유학자이며 문장가로서의 한유는 시대적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함에 있어서 유가의 사상을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이라는 인물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그들은 학문적으로는 유학 복고 운동을, 문학적으로는 고문 운동을 주장하면서, 혼란한 사회상을 개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안사의 난 이후, 당대에 일어난 문학에서의 변화, 특히 한유를 중심으로 한 고문 부흥 운동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