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 초기 우익세력에 대한 초기의 묵시적 지원은 1946년 중간파 지원으로 전환되었는데, 1945년 이승만, 김구 귀국 시 이들을 이용해 정치세력을 통합시키려는 시도가 이들의 비타협적 자기중심성 때문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미군정의 입장에서 자신의 지지기반이 되어야 할 우익들이 모스
1. 카이로 회담 ( 1943. 11.27)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해방시키며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
일제 식민시기 한국의 독립안건을 최초로
명시
2. 얄타회담 ( 1945.2.4 )
연합군의 소련의 대일전 참전권유
소련은 동북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를 획득
3. 포츠담 선언 ( 1945. 7. 26 )
5년간의 신탁통치의 실시와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와 관련한 결정서가 발표되었고 이 후 한반도 내에서의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대립이 심화되었다 장명학 2005, 『해방정국과 민주공화주의의 분열』p. 243
신탁통치 문제와 관련하여 초기에는 좌우익 세력 모두 신탁통치 절대반대의사를 천명하며
해방정국 속에서 외세에 의해 주도되었던 뼈아픈 남북 분단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지금 이라크는 앞으로 수십년 또는 수백년의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도 있을 매우 중요한 순간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과연 포스트 사담 이라크의 앞날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미국의
해방정국 속에서 외세에 의해 주도되었던 뼈아픈 남북 분단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지금 이라크는 앞으로 수십년 또는 수백년의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도 있을 매우 중요한 순간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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