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의 생애
채만식은 1902년 전북 옥구군 임피면 취산리에서 채규섭 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상당한 부농이었으나 1905년을 전후해 일제의 조선토지수탈 계략에 의해 경제적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채만식이 자란 고장은 금강과 만경강 사이의 평야 지대로서 양반적 유교 전통이
채만식이 세상을 떠난 50년에는 6․25라는 혼란기가 있었으며 그와 함께 문학을 하던 문인들이 대부분 6․25를 전후하여 남북으로 흩어져버렸다. 신동한,「채만식론」, <창조>, 1972, p.147.
또한 문학계에서도 채만식의 문학에 대한 안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도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래
그의 소설이 다루고 있는 인물은 회의주의와 감상주의, 패배주의에 젖은 사람들로서 현실의 변화 상황에 적절히 대응해 가지 못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좌절한 채 과거의 추억에 매달려 사는 퇴영적 인물로 특징 지워진다. 이 점은 흔히 그의 반근대성 또는 복고적 퇴영의 한 요소로 비판되기도 한다
문학사로 이미 서술되어왔다. 남북한을 다 같이 문제 삼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적 조건과 제약이 이미 해방직후부터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전 시대와 대비하여 제아무리 새로움을 이야기하더라도 반쪽으로 토막이 난 채 새롭게 형성되는 문학적 사태는 결코 은폐될 수 없다.
일반적인 문학
해방 공간에 대한 시대상 고찰
광복과 함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남으로써 우리 민족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국토가 분단되고 좌우익의 이념적 대립이 심화 되는 등, 정치․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뿐만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