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야말로 진정한 민족문화의 계승자라는 논리를 전파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여기에는 군사 정권의 딱딱한 이미지를 세종대왕의 문화 이미지로 순치시키려는 의도도 개입되어 있었다.
2) 박정희 정권의 외래어추방 캠페인
박정희는 그와 같은 사업의 일환으로 방송 용어에 외래
최대한 일본의 지리,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감정적인 측면을 배제하고자 노력했다. 일본을 정확히 아는 만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득과 혜택은 그만큼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일본은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이며, 미래 동반자적인 국가가 되어야 함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모두 감시 관리하는 주요직책이였는데 그러한 지위를 활용해 "북괴남침설", "5월에 북한이 남침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사회 혼란을 빨리 수습해야 된다."고 억지 설득 주장했지만, 당시 육군본부와 한미연합사령부 및 미국국무부도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무장 진압의 핑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비해 변화하였다. 그러나 정당정치가와 군인에 대한 공직추방과 재벌의 해체로 인해 정치적 경쟁자가 없어진 상황에서 관료조직은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권력을 바탕으로 전후 복구 시기는 물론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경제성장과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희망을 줌과 동시에 유신정권에게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조성했다. 그리고 이 같은 대중의 희망과 유신정권의 위기 속에 1979년 하반기가 시작되었다.
2) YH여공농성사건과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
한시대의 대 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갸날픈 여성노동자'들의 소위 『YH사건』이 발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