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가단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그 세가 컸다. 조선조 때 남도가 한국시가문학의 중심지가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정치적 패배세력의 유배지로서의 역할이다. 정치적 바람을 맞은 학문과 지식이 높은 유배자들이 남도에 부처 되어 살았다. 가족과 멀리 떨어진 그들은 착잡한 삶과 감정을 여러 형태의
시조는 장르상으로 세계를 자아화 하는 특성과 같이 개인적인 문학이다. 그것은 원천석(1339 - ?)과 길재(1353 - 1419)가망한 나라의 도읍을 돌아보고 비탄에 잠기는 시조를 지었다는 것에서 볼 때 잘 알 수 있다. 시조는 아직까지도 정확한 그 발생시기와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달리 해석하고 있다.
호남가단의 특징
(1) 한시 문학에서 뚜렷하게 드러남
(2) 경제적 여유로 인한 낭만적이고 개방적이며
낙천적인 사고
(3) 학당의 열풍
(4) 도학보다는 문학을 좋아하는 성향
옥봉 백광훈
落日寒溪曲 지는 햇볕 개울 굽이에 차고
山背雪後村 산은 눈 내린 마을 감싸고 있다.
生離已自苦 생이
1. 훈구 ㆍ 사림파의 형성과정과 문학론
이조 오백년 동안 정치적ㆍ사회적 지배층이었던 양반을 일컫는 말이 사대부이다. 사대부는 사(士)와 대부(大夫)의 복합어로, 능력을 길러 문학적인 교양을 지닌 문인학자들이면서 대부가 되어 경륜을 펴고자 했다.
고려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부르짖었던
성산가단을 빛낸 시인은 정철(鄭澈. 1536~1593)이다. 정철은 원래 서울 출신이지만, 관직에 진출했던 기간을 제외한 나머지 반생을 호남에서 지내면서 송순 이래의 전통을 잇고, 여러 사람과 교유하면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수련을 쌓았다. 가사를 여러편 짓고, 시조는 90여 수나 된다. 호남가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