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란 전의 정세
(1)조선의 대여진 정책
조선과 여진과의 관계는 주로 경제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정치적․군사적 문제로 확대되었다. 여진의 조선에 대한 경제적 요구는 명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직접생활에 필요한 물자에 국한되었으며, 그리하여 명․조선 두 나라에 대하여 이중적
성리학은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치세력을 성리학자로 바꾸었으며, 고려시대의 지배이념인 불교의 지위를 크게 하락하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간쟁을 담당하는 낭사가 독립적이지 못했지만, 조선시대에는 사간원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이역시 임금이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해 성인과 같이 정치를
호란이 미친 영향에 대해 교재를 참고로 하여 기술해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한중일 상호인식의 흐름이 왜란에 미친 영향
1) 조선-명의 상호인식
필자의 생각에 조선-명나라의 상호인식이 왜란에 미친 영향은 크게 2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교재에 따르면 명의 엽향고는 “수당 시절의 고
호란과 소중화
포로가 된 왕자들
청군에 항복한 조선의 인질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으로 잡혀감(1637)
심양일기, 심양장계
: 두 왕자의 심양체제, 당시 조청관계, 건국 당초의 청 왕조에 관해 보여줌
1637년 4월 ~ 1645년까지 8년의 인질생활
소현세자
외교 절충 책임자 역할
명 잔존세
3. 조선왕조실록과 두 종류의 광해군 일기
국왕의 일대기를 의미하는 실록은, 당대 이후부터 국왕의 사후 편찬하도록 제도화 되어있다. 조선에서는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부터 편찬을 확인할 수 있으나, 각 왕대의 실록이 모두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실록과 달리 고려시대의 실록은 현존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