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기를 선동하였을 만큼 그가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약 200여년이 지난 후에도 변함없는 사실로 남아있다.
2. 서북지역의 지역적 특색, 그리고 차별
평안도의 중심인 평양은 옛날부터 우리나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다. 고조선의 수도도 평양이고, 고구려가 만주벌
봉기군은 영변을 공격하고 이어 안주를 함락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박천을 점령한 후 직접 안주를 공격하자는 논의가 제기 되었다. 도원수 홍경래가 이를 승낙하려 했으나 모사 우군칙이 원래의 계획대로 영변을 친 후에 안주를 칠 것을 고집하였다. 안주, 영변의 진공을 앞두고 내분이 일어
Ⅰ.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배경
홍경래의 난은 1811년 12월 18일 (순조 재위 11년)에 일어난 것으로 조선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비교적 큰 규모의 농민항쟁이었다. 이때 재위하고 있던 국왕의 묘호가 순조가 된 것은 홍경래의 난 진압의 성공에 기인한다. 그만큼 대규모 봉기로 조선왕조에 커다란 충격
물론 문(文)으로 가문을 빛내는 인물들을 조사하는 것도 좋겠거니와, 나의 조상들이 누가 있나 확인해가는 과정에서 과연 공부로, 과거시험으로 이름을 떨친 분들이 아닌 역사의 한 흐름에서 무언가를 바꾸려고 노력한 사람이 있나 보던 중, 홍경래(洪景來)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홍경래를 모르는
1. 조선후기 정치적상황과 삼정의 문란
1) 세도정치와 통치 질서의 와해
숙종 ․ 경종대에 나타나기 시작한 일당전제의 추세와 극심한 정쟁 등 붕당정치의 말기에 두드러졌던 현상은 영 ․ 정조의 탕평책과 강력한 왕권 아래에서 일당 억제했었지만 그 근본적인 해결책이 제시된 것은 아니었다.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