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만종, 강희맹, 김만중, 양성지, 이양오, 이우준 등을 들 수 있다.
홍만종은 [명엽지계]에서 패설(稗說)을 지은 동기를 파한(破閑)에 두었다.
영·정조 이후 평민·중인 계층과 양반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 계층가지 독자층이 확대된 이유로는 ⅰ) 판소리의 보급, ⅱ) 이야기꾼(전기수)의 활약, ⅲ) 딱지
문학론
홍만종이 편찬한 <시화총림>에 수록되어 있는 시화집 <백운소설> 은 이규보가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홍만종이 <시화총림>을 편찬하면서 다른 책의 경우에도 시화만을 뽑았으니 <백운소설> 이 순수한 시화집이었는가라고 의심할 수 있고, 이규보가 <백운소설>을 지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은 단군의 치적을 거론하여 문화영웅으로 승화하였다. 18세기에는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 허목, 홍만종이 제시한 단군 인식을 보다 체계화시켰다. 안정복보다 더 나아가 단군정통론을 세운 동시에 단군 신교까지 인정한 것은 동사를 쓴 이종휘였다.
조선후기에도 단군사당은 조
홍만종의 ‘순오지(旬五志)’에 의하면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지었다는 설도 있으나 <고금가곡>에 허난설헌이 작자로 밝혀져 있고, 허난설헌의 오언 고시 소년행과 규원가가 그 내용이 비슷하기 때문에 대체로 허난설헌 작이라는 설이 정설로 취급되고 있다.
다.
엇그제 저멋더니 마 어이 다 늘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