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남사변 이후 항일 민족통일전선이 결렬되자 송경령은 환남사변의 진상을 폭로하고 장개석 정권에 대해 호된 비난을 퍼부었다. 3차에 걸쳐 반공의 기운이 고조되고 내전의 위기가 깊어지는 가운데 국민정부의 각 당파에 대한 탄압과 중공 항일 근거지에 대한 봉쇄가 가열되자 송경령은 이를 반대하였
환남사변 발발 → 제2차 국공합작의 분열
- 일소(日蘇)중립우호협정 체결
- 12월 태평양 전쟁으로 확전과 더불어 일본군의 변구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 돌입
- 공산당 세력의 고립으로 인한 내부적 비판과 동요 발생(ex. 왕실미王實味)
➪ 해방구 내부의 정신적, 사상적 무장과 개조를 위해 정풍운
Ⅰ. 배경 : 1942년, 연안(延安)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 제2차 국공합작
문예의 선전·선동 기능을 이용하여 공산당에 항일전쟁의 대의와 정통성이 있음을 선전.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의 「지식인을 대량 흡수하자(大量吸收知識分子)」(1939.12)
1941년 환남(晥南)사변 - 국공합작이 분열의 조짐.
작품의 서정적 분위기를 살렸다. 이 작품은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갈등이 가장 증폭된 형태로 나타났던 ‘환남사변(晥南事變)’이 일어난 뒤에 창작된 작품으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하여 당시의 시대상황을 묘사하고자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곽말약 역사극의 전체적인 주제는 단결항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