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개요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가 내선일체론을 전면화하고 있지만, 내선일체의 방식을 둘러싼 입장이 완전히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우선 내선일체론의 담당자를 분명히 함으로써 우리는 내선일체에 관한 논의의 범주를 한정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 일본 연구자 궁전절자는 당시 내
3․1 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거족적인 저항이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었다. 이는 1910년대 일제 식민지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3․1운동의 배경으로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로 10년간 일제가 식민통치기간에 보여준 억압과 약탈에 대한 전 한
‘내선일체’의 황국 신민화 정책과 한민족의 저항
신사 참배 강요
-1925년 서울 남산에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
을 모시는 조선 신궁이 세워짐
-1936년에 개정된 신사 규칙으로 마을마다 신사를 만드는
정책을 시행
-1938년에는 ‘내선일체’의 상징으로 백제 옛 도읍지인 부
2. 황국신민화 정책의 추진
일제는 전시체제를 빙자해 일반 주민생활도 철저히 통제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주민생활통제의 중심기구로 1938년 8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을 총독부 보위기관으로 설치하였는데, 이 단체는 도에서 리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지방조직을 망라하고 그 밑에 10호 단위의
Ⅱ. 전시 체제하의 군수 공업
1. 군수 공업의 발전
• 일본은 만주사변이후 조선을 군수기지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
일본은 만주사변 이후 조선을 군수 기지로 만드는데 착수하였다.
• 조선총독 미나미 - 조선의 대륙전진병참기지화
조선총독 미나미는 “제국의 대륙전진병참기지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