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초령비는 그 발견과정에서 시련을 겪었는데 전란 중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52년 윤정현이 각을 세우고 조각들을 짜맞추어 안치함으로써 비로서 보존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1931년에 나머지 한 조각을 찾아내서 겨우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북한의 함흥 역사
황초령비와 북한산 순수비를 고증한 한국 금석학 최초이자 최고의 논문이다. 우선 본고에서는 『예당금석과안록』논문 자체에 분석과 왜 이러한 논문이 나오게 되었는가에 대해 추사와 시대적 배경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추사 이후의 금석학의 발전을 살펴봄으로써 조선에서의 금석학 발전에 대
시대로 추정(장수왕)
현재 남한에 존재하는 유일한 고구려시대의 비석
단양 신라 적성비
국보 제 198호
소재지 :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
제작시기 : 신라(6세기 진흥왕)
한강 하류의 북한산비
낙동강 유역의 창녕비
함경도 지역의 마운령비, 황초령비
신라의 영토 확장을 기념해서 세운 비석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는 연호화 간지를 둘다 표기하고 있다. 연호가 법흥왕대부터 사용되었지만 연대 표기에는 간지 사용이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월일 표기에서 확실한 날짜는 월일을 표기했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는 월중으로 표기하였다. 요컨대 중고기 금석문에서는 연월일 표기에는 어떤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를 세웠는데, 이후에 다시 고구려가 수복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구려가 멸망하자, 8세기 초에 발해가 함경도 일대를 영토로 삼았다. 발해가 거란족의 침공으로 멸망한 이후에 함흥평야 일대는 고려에 소속되었으나 함경도 대부분의 지역에는 여진족이 거주하였다. 고려는 함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