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례연(會禮宴) 등 여러 잔치 및 행사에서 연주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아 궁중에서 연주되기 위해서 그 내용의 일부가 바뀌거나 표현의 일부가 제한되어 사라졌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현재 여러 가지가 연구되어 밝혀졌다. 우선 <만전춘별사>라는 별칭 자체가 <만
회례연 등에도 기악(妓樂)이 등장하여 아악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등 전란을 겪는 동안 악인(樂人)과 악기가 산실되어 아악은 그 복구가 극히 어려운 형편에 놓였으나 1647년(인조 25) 이후에야 겨우 종묘, 사직, 문묘 기타 다른 제향에 아악을 다시 쓰게 되었다.
숙종,
회례연․양로연․사신연과 같은 공식적인 연향, 격구(擊毬)․매사냥․관사(觀射) 등 왕실 여가생활 후에 베푸는 소소한 연향, 변방지역에서의 야인회유와 군사를 위로하는 연향 등에서 악가무를 함으로써 분위기를 화락하게 하여 군신민(君臣民) 사이의 화합 및 사대교린에 일조를 했고,
<국악의 멋과 감상>
-국악곡의 분류:아악, 당악, 향악
-아악:
원래 뜻은 중국의 제례악을 의미하며, 1116년(고려 예종 11)에 한궁[ 수입된 대성아악을 가리킨다. 이 대성아악은 고려와 조선 초까지 궁정에서 행하는 원구,사직, 태묘, 선농, 선잠, 공자묘 등의 제사와 연향(국가적 규모의 큰 잔치)에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