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배운 후 효공왕 13년(909)에 귀국하여 경순왕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소백산에 은거했는데, 고려 태조가 그를 맞이하여 법을 듣고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인 지평(砥平) 보리사(菩提寺)의 주지로 봉했다. 대경대사는 이곳에서 태조 13년(930)에 입적하였는데, 그 때의 나이는 69세, 법랍은 60세였다.
안양(安養)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궁예의 후예인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산꼭대기의 구름이 5가지 빛으로 채색을 이룬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효공왕 5년(901)에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며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불렀다. 신라 왕자출신인 그가 <삼국사기>는 그의 아버지를 47대 헌안왕(憲安王)으로 적으면서,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한다고 전한다. “일관(日官)이 ‘장차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 하니 기르지 마옵소서’ 라고
양길과 궁예가 들고 일어나 신라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되고 만다. 여기저기서 반란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신라는 경주 부근에만 남게 되자 진성여왕은 10여년 간의 정사에 막을 내리고 효공왕에게 선위했다. 물러앉은 진성여왕은 사랑했던 위홍의 영정을 짓고 명복을 빌다가 6개월 만에 죽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