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넘어 태평성대와 최고의 나라를 건설할 자신이 젊은 세종에게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형님인 효령이 출가하면서 세종에게 남긴 “현세의 미륵이 되어라”는 당부와도 무관하지 않다. 세종은 그러한 시대적 안목과 대의가 있었기에 뜻있는 선비들을 규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효령(孝寧)·충녕 등 세 대군이 있었고, 양녕대군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를 폐하고 새로이 세자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세자 폐립에 관해 의론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은 이미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쏠려 있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사장의 재능으로 문치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월당은 이 체제에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역시 사대부 출신이고 하나의 독서인으로서 큰 포부를 지녔지만 정치권력에 접근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실을 완전히 등지고 말았다. 중세기에 있어서 끝까지 저항의 자세를 굽히지 않았던 특이
군당위공 부즉여군불편
마침 감릉 사람인 유문이 남군의 요사스런 도적인 유유와 교통하고 청하왕이 천하를 통치해야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뜻은 유산을 세워 공로를 구하려고 하니 곧장 청하상 사호를 겁박해 칼을 잡고 협박해 말했다. “우리들은 응당 왕을 천자로 세우며 군은 공이 응당 될 것이
사장사
포로의 자녀는 모두 돌아가게 놔주고 보물은 다 장사에게 하사하였다.
遠近聞知, 夏王有不殺之心, 人民悅服, 其易、定等州聞風歸附。
원근문지 하주유불살지심 인민열복 기역 정주등문풍귀부
원근에서 들어 알고 하나라 군주가 죽이지 않는 마음이 있음을 알고 백성이 기뻐 복종하니 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