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九)·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임치정(林蚩正)·이종호(李鍾浩)·주진수(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
[배경]
1905년 을사조약 체격 후 헤이그 특사 파견을 트집 잡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강제 해산하는 등 일제의 한국 침탈행위가 날이 갈수록 그 도를 더해가자 이에 대항하
金九)가 이끄는 일부 민족진영 즉 한독당(韓獨黨)과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을 비롯한 수개단체에서 남북한 정치회담을 제기하고 나서고 김구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등이 북쪽에 가서 4일간 즉 1948년 4월 19일부터 회담에 임하였으나 그들의 일방적인 행동에 이용만 당한 셈이 되었다.
그후 남한에
金九) 선생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패배자인 ‘김구선생을 존경하면, 우리역사에서는 정의가 패배한다’는 역설적 당위로 귀착되었다. 이는 정의의 개념으로 승리하고 그리하여 ‘정의가 승리한다‘ 라는 희망을 미국시민들 품속에 남겨준 링컨이란 인물에게 노무현이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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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정리-김구의 업적>
김구(金九)
1876 - 7월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남
1880 - 강령으로 이사
1887 - 사랑방에 글방을 차리고 이 생원을 초빙하여 한문 공부를 함
1890 - 정문재에게서 글을 배움
1892 - 과거에 응시했으나 과장에서 매관매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실망. 집으로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