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한자가 창제된 이후에도 문자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즉, 구어는 우리말이었으며 문어는 여전히 한자로 존속하였다. 특히, 상위계층인 사대부들은 한글을 천시하고 한문을 높이 평가하여 한자생활을 꾸준히 계속하였는데, 이들의 이러한 가치관과 문화가 반영된 것이 바로 한문학이
되었고, 그의 문인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은 가장 유명하였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柳子光) 중심의 훈구파(勳舊派)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史禍)로 조선시대 4대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이다.
되었고, 그의 문인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은 가장 유명하였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柳子光) 중심의 훈구파(勳舊派)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史禍)로 조선시대 4대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이다.
金宏弼(김굉필)-趙光祖․․․로 이어진다는 그들의 이 학통관은 실제 학문의 전수관계나, 학문의 업적만으로 설정되고 인정되는 것이 아니다. 성리학이 지닌 도학의 측면인 [義理俱現]을 기준으로 설정되고 인정되는 것이다. 이로써 한국 성리학에는 의리의 실천궁행을 강조하는 도학적 성격
金宏弼), 조광조(趙光祖) 등에게 전승되어 한국 도학의 큰 흐름을 이루었다.
3) 한국 성리학 융성, 퇴계와 율곡의 출현
- 16세기 중반 이후 한국 유학은 큰 전환을 보게 된다. 조선 전기의 도학적 전개에서 인성론적(人性論的) 전개로의 전환이 바로 그것이었다. 거듭된 사화(士禍) 조선 시대에, 조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