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어느 시대든 정치적·사회적으로 새로이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이라면 나름대로의 고뇌와 책임을 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나말여초’의 역사적 전환기 속에서 육두품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펼 기회조차 없었던 최
朗慧和尙白月光塔碑銘幷序, ④ 初月山大崇福寺碑銘幷序를 가리킨다. 언제부터인가 이 碑銘들이 네 산에 있다고 해서 四山碑銘으로 불리어진 것이다. 이 사산비명은 모두 왕명에 의해 지어졌는데, 이 가운데 眞鑑禪師碑銘, 智證大師碑銘, 朗慧和尙碑銘은 高僧大德들에 대한 각각의 墓碑銘이고, 崇福寺
和尙傳)>에 의하면 화엄 10찰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에는 탄문(坦文, 900~975) 스님과 관련되어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이었음이 탄문의 탑비 명문에 의해 밝혀졌다. 이후 보원사는 화엄종의 성쇠와 궤를 같이 하여 고려 후반 이후로 사세가 기울어져 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증동국여
5.8. 신라 한문학의 성숙
5.8.1. 신문왕과 설총
백제와 고구려를 아우른 신라는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다스리는 기간 동안에 통일국가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뛰어난 기상을 자랑하던 영웅의 시대는 가고, 유학의 지식을 활용해 행정실무에 종사하는 문신을 특히 육두품 신분에서 양성하고 발탁해야 할
신라의 지성(知性) 최치원(崔致遠)
1. 中國을 압도한 大文章
고운(孤雲) 최치원은 신라 말엽에 육두품(六頭品) 출신으로서 중국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황소(黃巢)의 난을 격문으로 평정함으로써 문장은 능히 중국을 압도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유학의 시종(始宗)이 되었고 유불도(儒佛道) 3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