良志)는 그 조상과 고향이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선덕왕대에 그 자취를 세상에 드러냈을 뿐이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존상을 소조할 때 마음을 고요히 하여 삼매의 경지에 드는 태도로써 그 질료를 이기고 주무르는 방법을 삼았다. 그래서 온 성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날라주었다. 그때 부른
良志)에 돌아갈 것인지를 연구하면서, 정 · 주(程朱)의 번쇄한 방법으로는 ‘자아의 뜻을 성실하게’ 할 수 없다고 여겼다.주자학의 특징은 궁리(窮理)를 지(知)에 가두고 이것을 행(行)과 분리시킨 것인데, 이 점 때문에 지리한 폐단을 낳았다는 것이다. 왕수인은 주희와 육구연의 문제점을 지양하는 가
良志)와 관련된 노래이다. 그가 영묘사(靈竗寺)에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조각할 때에 장안의 남녀들이 진흙을 운반하여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양지는 가문을 알 수 없는 신분이고, 지팡이와 자루를 보내 동냥을 했다고 하듯이 일반 백성 단골들에 의지해서 살아가며 스스로 장인 노릇을 했다. 풍요
良志)와 관련된 노래이다. 그가 영묘사(靈竗寺)에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조각할 때에 장안의 남녀들이 진흙을 운반하여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양지는 가문을 알 수 없는 신분이고, 지팡이와 자루를 보내 동냥을 했다고 하듯이 일반 백성 단골들에 의지해서 살아가며 스스로 장인 노릇을 했다. 풍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