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正己) 집안은 대표적인 예이다. 다른 일부는 이탈하였으나 대조영집단과 말갈족의 걸사비우(乞四比羽) 집단은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이진충이 이끄는 거란군은 신속히 북중국의 하북지역으로 남진하였다. 그 해 9월 이진충이 사망하자, 손만영이 무리를 이끌고 당군을 격파하며 크게 세력을 떨쳤다.
전념하던 때이기도 하다. 특히 원화 10년(815년)에서 14년(819년)에 이르는 기간은 반당(反唐) 최대의 강력한 번진인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가 세운 평로치청(平盧淄靑)과 사투를 전개하던 때이다. 이 평로치청의 정벌에 선봉에 선 것이 무령군이었다. 따라서 무령군에서는 많은 병사가 필요로 했다.
중국사와 한국사
중국의 역사왜곡(동북공정)과 우리의 대응방안
Ⅰ. 서 론
올해 초, 방송사들은 연일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역사로 편입시키려 한다는 보도를 했다.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3조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으며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인정받기 위한 활동을 전개중이라는 것이다. 이른
5. 궁정 음모가들에 의한 장보고의 죽음
그러면 장보고는 왜 죽었을까?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장보고는 신라 하대 왕실의 왕위쟁탈전에 관여하여, 신무왕의 쿠데타에 자신의 군사를 제공하였다. 그 대가로 그는 감의군사와 진해장군의 관작과 2천호의 식읍을 받았으며, 아울러 자신의 딸을 왕비로
1.서론
우리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 같은 위인 중의 한 분은 장보고(張保皐,?~841) 청해진 대사이다. 그는 통일신라시대 인물이면서 당시 중국, 일본의 정사(正史)에 등장할 정도로 국제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국제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그는 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