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資玄)의 행적과 작품에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정지상(鄭知常)은 이름은 잊었다고 하면서 작품을 거론했다. 당시까지의 시인과 시를 어느 정도 다룬 셈이니 수록한 자료가 대단하다 하겠는데, 거기다가 오세재임춘 그리고 이인로 자신의 경우를 보태서 자화자찬을 하는 것으로 드러나
Ⅰ. 들어가며
60세를 시작한 이규보의 인생은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파란만장했다.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그에 따른 民亂과 民心을 이용한 反亂이 일어나기도 不知其數였다. 게다가 몽골, 金뿐만이 아니라 東眞國의 지속적인 침입은 고려의 遷都를 야기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이규보
1. 무신란
- 유학 사상의 발전적 전개상의 왜곡
- 경명행수의 학풍 차단
2. 유·불 융합, 조화
- 고려 사상계의 새로운 조류
직위에서 해임된 이후에는 시와 술로 스스로 즐기면서 「능엄경(楞嚴經)」을 즐겨 읽고 그 9권을 외웠으며 또한 나라에 큰 문서를 지을 일이 있거나
④憂國衷情과 抗日의 노래
19세기로 접어든 조선은 국론이 삼분오열하며 결국 경술국치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위태로운 조국의 현실을 표출한 대표적 문사는 강위, 이건창, 황현, 김택영으로 이어지는 韓末四家들이다. 그 중에서도 강위와 이건창은 아직 망국 이전의 인물이라서 우국충정의 시
고려전기 한문문학이 한국학의 중요한 일부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한국 한문문학사의 전개과정을 연구함에 있어 고려전기는 다른 시대에 비하여 상대적 부진과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자료의 빈곤이라는 일차적 요인이 작용하였겠지만 이밖에도 이 시대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