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문신, 유학자, 문장가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고운, 해운, 해부이며, 시호는 문창이다. 868년 당나라로 건너가 과거에 급제한 후 당나라의 관료로 생활하였다. 신라 말 삼최 중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최치원이 쓴 계원필경은 남북국시대 통일
당나라에서의 활동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 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는데, 그때 지은 작품이 『금체시(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雜詩賦) 30수 1권』등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을 이루게 되었다.
894년 시무(時務) 10여조(條)를 상소, 아찬(阿)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亂世)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선생은 또한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서 역사를 정리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연표형식으
최치원이 지은 격문(檄文)으로, 황소(黃巢)가 이 격문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뛰어난 명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시문집은 <계원필경(桂苑筆耕)> 실려 전해지고 있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난을 다스린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이들의 모함으로 외딴 섬